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문단 편집) == 역사 ==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오케스트라들도 오페라 극장에 속해 있거나 황족, 귀족 등 [[높으신 분들]] 전용의 악단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활동하던 시기인 18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빈에 상설 콘서트 오케스트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콘서트가 열릴 때 마다 오케스트라가 임시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런 임시적인 콘서트 오케스트라에는 프로음악가는 물론 아마추어 음악가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었다. 일례로 1824년 베토벤 교향곡 9번 초연 시에는 케른트너 극장 소속 오케스트라에 별도 오디션을 통해 충원된 인원을 연합하여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는데, 여기에도 다수의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악단으로 평가 받은 것이 빈 궁정 오페라극장 소속 관현악단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이 오케스트라를 콘서트에도 이용해보자는 발상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1833년 빈 궁정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콘서트를 연주했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842년 지휘자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의 주도하에 본격적으로 연주회용으로 굴려보자는 취지하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명칭을 가지고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첫 연주회는 그해 3월에 궁정 무도회장이었던 레두텐잘에서 열었는데, 비록 궁정극장 악단을 모체로 했다고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최초이자 그 당시 유럽에서도 거의 없던 콘서트 전문 관현악단으로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니콜라이는 창단 직후 1848년까지 상임 지휘를 맡았는데, 사임 후 한 동안 객원 지휘로 돌리다가 1854년에 칼 에케르트가 두 번째 상임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에케르트도 1857년에 물러났고, 그 뒤로 침체기에 빠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악단 안팎에서 계속 비판이 오갔고, 결국 단원들 스스로가 악단 운영과 지휘자 초빙 등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자주 운영 체제를 도입해 재출발을 꾀했다. 이 때부터 빈 필에 초빙되는 모든 지휘자는 직위에 관계 없이 단원들의 찬반 투표로 뽑히고 있다. 이 제도로 처음 뽑힌 상임 지휘자는 1860년 취임한 오토 데소프였고, 같은 해 공연장을 레두텐잘에서 케른트너토어 극장으로 옮겼다. 1869년에는 악단의 주요 후원 단체였던 빈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가 여러 크기의 공연장을 포함한 새 건물을 지었는데, 바로 [[빈 무지크페라인]] 건물로, 빈 필도 상주공연장을 대강당으로 옮겼다. 1875년에 데소프가 사임한 후 후임으로 선출된 [[한스 리히터]]는 1898년까지 20여년간 빈 필의 상임 지휘자로 재임하면서 악단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리히터는 바그너의 제자였지만 스스로의 음악적인 식견에 근거해 바그너파, 브람스파 음악을 고루 연주했다. 리히터는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와 [[안톤 브루크너|브루크너]] 등 당대 작곡가들의 여러 중요한 관현악 작품들을 초연했다. 리히터는 1882년에 한번 사임했고 빌헬름 얀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지만, 얀이 부임 직후 악성 눈병으로 실명하는 바람에 일년만에 리히터가 다시 복귀해 1898년까지 재차 상임으로 재직했다. 리히터의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지휘자들은 펠릭스 모틀, 헤르만 레비 등으로, 이들은 모두 친 [[바그너]] 계열이었다. 당시 빈 음악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친 [[브람스]] 계열의 거두인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바그너파의 취임을 결사 반대하고, 브람스와 깊은 친분이 있었던 [[구스타프 말러]]를 밀어줬다. 브람스파의 지원 덕분에 말러는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빈 국립 오페라극장(가극장)과 빈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말러는 취임 후 자신의 [[교향곡]]들 뿐 아니라 기존 작품도 대대적인 편곡을 가해 연주하는 등 꽤 파격적인 스타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악단 조련 실력은 전임자들 못지 않았고, 1900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 기념 연주회에 초빙되어 창단 이후 최초의 국외 공연 기록을 남겼다. 말러가 1901년에 대내외의 비난 등으로 인해 사임한 뒤에는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가 후임이 되었지만, 헬메스베르거도 1903년까지 단기 재임에 그쳤다. 이후 상임 지휘자 제도를 아예 없앴지만, 1908년에 궁정오페라 음악 감독이었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초빙하면서 사실상 상임 지휘자나 마찬가지인 '정기 지휘자(Abonnementdirigent)' 라는 새 직책을 만들었다. 이 직책은 1933년에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빈 외에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고, 곧 상주 관현악단으로 고정 참가하게 되었다. 바인가르트너의 후임으로 1927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영입되었다.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에서 3년간 재임했으나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거절하고 베를린 필에만 전념했다. 때마침 세계경제대공황을 겪고 있어 여러 지휘자들이 미국으로 떠나기도 해서 빈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후임 인선에 다소 난항을 겪었다. 다소 논란 끝에 클레멘스 크라우스를 후임으로 선출(1930년)했는데, 크라우스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외손자라는 후광과 잘 생긴 외모와 위풍당당한 풍채로 빈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그의 지휘 역량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되었다. 마침내 빈 필은 그를 경질하려 했으나, 크라우스는 이를 거부했고, 1933년 빈 필은 크라우스의 반발 속에서 아예 정기 지휘자직(Abonnementdirigent)을 폐지했다. 이 조치는 당시에는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나, 마땅한 후임도 없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며 고착화되었다. 하지만 이 악단도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그로 인한 사회 정세의 불안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고, 특히 1938년에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시키자 존재 자체가 위협 받기 시작했다.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 선전가들은 이 악단의 즉각 해체를 주장했고, [[유대인]] 단원들은 망명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음악계의 중진들이 악단의 존속을 여러 차례 간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 호칭과 함께 단원들의 병역 면제와 안정된 수입의 보장 등이 약속되었다. 하지만 여타 제국 관현악단들과 마찬가지로 빈 필도 나치나 [[독일군]]을 위한 자선 공연이나 선전 집회 등에 참가해 의무적으로 공연을 해야 하는 대가를 치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활동을 계속 했지만, 빈도 [[베를린]] 등 다른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연합군의 중요한 폭격 목표가 되어 연주회가 취소되는 등 상황을 면치 못했다. 그나마 베를린 필과 달리 상주 공연장인 무직페어라인 홀이 [[개박살]]나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고[* 대신 폭격으로 오르간이 파손되었다.], [[소련군]]이 빈을 점령했을 때도 대부분의 단원들은 벙커에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종전 후에는 다른 추축국 소속 관현악단들과 마찬가지로 군정 당국에 의해 인원 정리가 행해졌고, 나치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이나 반 나치 지휘자들도 속속 복귀해 무대에 섰다. 동시에 그 동안 빈 필을 지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다른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 등의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출연했고, 데카나 EMI 등의 음반사와도 녹음 작업을 재개했다. 해외 공연도 전쟁 전보다 더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데, 특히 [[미국]]과 [[일본]]에서는 아예 '빈 필하모닉 주간' 이라고 정해 놓고 정기적인 순회 공연을 개최하고 있고 [[대한민국|한국]]에도 베를린 필보다 더 자주 와서 연주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이 악단이 셀링 포인트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 2006년에는 오스트리아 조폐국에서 악단 명칭이 들어간 24캐럿 금도금 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 항공]]에서도 자사의 [[A340]] [[여객기]]에 이 주화와 악단 이름을 도색한 기체 한 대를 빈~[[도쿄]] 노선에서 비정기 운항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